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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옷으로 시를 써온 그녀, 81세 디자이너 진태옥 [ People]
findall (15-10-17 09:10:40, )
\\\"흰색은 한 번도 빛깔이었던 적이 없다.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흰색이 한국의 진태옥이라는 디자이너를 만났다. 비로소 색채(color)가 됐다.\\\"

패션 디자이너 진태옥(81)이 글을 읽고 두 눈을 감았다. 지난달 30일 영국의 세계적인 패션 저널리스트 수지 멘키스(Menkes·72)가 이메일로 보내온 글이었다. 멘키스는 현재 전 세계 패션 업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언론인으로 꼽힌다. 그의 기사는 13개 언어로 번역되고 그가 쓴 글 한 줄에 외국의 숱한 디자이너들이 울고 또 웃는다. 그런 멘키스가 진태옥에게 이런 글을 보내온 것이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진태옥은 잠시 후 눈을 가늘게 떴다. 22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1993년 가을이다. 진태옥은 우리나라 패션 디자이너 최초로 프랑스 파리 \\\'프레타 포르테(\\\'고급 기성복\\\'이란 뜻의 패션쇼)\\\' 무대에 섰다. 단독으로 쇼를 열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쿵쾅거렸던 첫 번째 파리 쇼. 끝나고 무대 뒤편에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한 외국 여기자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걸어와 진태옥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머리를 뒤로 휙 넘겨 세운 스타일이 독특했다. \\\"마담 진, 여기 있었군요. 전 수지예요. 당신과 악수를 하려고 5분을 기다렸어요!\\\" 진태옥은 그 순간을 여전히 짜릿함으로 기억한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유럽 사람에게 한참 설명하다 결국 포기하곤 했던 시절이었어요. 수지 멘키스는 당시에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서 일하며 전 세계 패션 디자이너들을 쥐락펴락했는데 그런 수지가 제 첫 파리 무대를 보고 찾아온 거죠.\\\"

그 후로 22년. 세월이 쏘아 올린 화살처럼 지나갔다. 진태옥은 지난 7월 서울을 찾아온 멘키스와 자신의 사무실에서 다시 마주했다. 멘키스는 이번에도 성큼 다가와 진태옥의 두 손을 잡았다. \\\"당신을 꼭 제일 먼저 만나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는 진태옥의 지난 컬렉션을 모두 훑어본 후 이렇게 말했다. \\\"마담 진, 당신은 그동안 옷으로 시(詩)를 썼군요….\\\"

옷으로 시를 써온 그녀. 패션 디자이너 진태옥이 데뷔 50주년을 맞는다. 1999년 영국 파이돈출판사가 선정한 \\\'20세기 패션 디자이너\\\'에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한국인이다. 현재 파리 국립장식미술관엔 진태옥의 드레스가 \\\'한국 지금\\\'이라는 제목 아래 전시되고 있다. 내년 1월 초까지 걸린다. 16일부터 서울DDP에서도 진태옥을 위한 50주년 특별 전시가 시작된다. 전시 제목은 \\\'앤솔로지(Anthology)\\\'. 말 그대로 진태옥의 \\\'시\\\'를 모아놓았다는 뜻이다.

지난 2일 진태옥과 마주했다. 그는 맨발로 스스럼없이 카메라 앞에 앉았다. \\\"사람이란 원래 뭘 많이 걸칠수록 어색한 법이니까요.\\\" 목소리가 찻물처럼 맑았다.

맨발로 카메라 앞에 앉은 진태옥. 허리는 소나무처럼 꼿꼿하지만 몸 매무새는 갈대처럼 나긋나긋하다. 진태옥은 “매일 아침 7시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을 한다. 지금껏 여자이길 포기한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했다.
맨발로 카메라 앞에 앉은 진태옥. 허리는 소나무처럼 꼿꼿하지만 몸 매무새는 갈대처럼 나긋나긋하다. 진태옥은 “매일 아침 7시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을 한다. 지금껏 여자이길 포기한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했다. / 이태경 기자
나를 눈멀게 했던 그 화이트

―심플하기 그지없는 검정 드레스 차림입니다.

\\\"쉰인가 예순을 넘겼을 때였을 거예요. 새벽녘 일어나 새하얀 셔츠에 검정 바지만 입고 거울 앞에 섰는데 그 흑백의 조화를 보면서 \\\'아, 내가 이 순간을 위해 살았구나\\\' 싶었어요. 여기에 대체 무엇을 더하겠나 싶더군요. 그 이후로 제 차림은 늘 비슷합니다.\\\"

―1960년대에 패션 디자이너 일을 시작하셨죠.

\\\"1965년에 이화여대 앞에 작은 옷가게를 내면서 일을 시작했어요. 우리나라 근현대 패션의 역사는 한국전쟁 이후에나 시작되잖아요. 1950~60년대에야 비로소 여성복이 꽃피었는데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부인복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전 혼자 바삭하고 빳빳한 흰 셔츠부터 만들었죠. 처음엔 누가 내 옷을 살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걸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 팔리더라고요. 그때부터 어쩌면 한국인의 DNA엔 \\\'모던\\\' \\\'미니멀\\\'에 끌리는 무언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우리나라 선비가 난을 쳐 놓은 그림을 보면 얼마나 담대하고 또 단순합니까. 전 오래도록 그걸 옷으로 구현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원래는 법을 공부하고 싶어하셨죠.

\\\"함경남도 원산에서 나고 자랐어요. 어머니는 신학을 공부하셨어요. 아버지와 일찍 사별하신 탓에 항상 화려한 색은 거의 입질 않으셨어요. 취향이 참 검소하고 성격은 대쪽 같았어요. 제겐 항상 \\\'여자라고 남자보다 못할 게 하나도 없다\\\'고 가르치셨어요. 그런 어머니 아래 자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어릴 땐 법관이 꼭 되고 싶었어요. 6·25 직후 서울대 법대 시험에서 똑 떨어지고 나니 마음이 갈 곳을 모르겠더라고요. 서울대 총장 비서실에서 3년 동안 일했어요. 그러다가 스물다섯에 시집을 갔고요.\\\"

―결혼 생활은 어땠습니까.

\\\"시어머니가 무서워서 숨도 못 쉬고 살았어요. 첫 아이 낳고 나니 \\\'더는 이렇게 못 살겠다\\\' 싶더군요. 1953년인가 탈출하는 심정으로 국제복장학원에 등록했어요. \\\'이종천 패션연구소\\\'에서도 1년 동안 수업을 들었고요.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어요.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동안엔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더라고요. 밤새 재봉틀을 돌려서 옷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처음 만들었던 옷도 아마 흰 셔츠였을 거예요. 첫 가게도 바로 그 무렵에 낸 거죠.\\\"

―왜 그렇게 화이트 셔츠가 좋으셨나요.

“16세 때 6·25전쟁이 터져서 제주도로 피란을 내려갔어요. 움막에서 숨어 지냈는데 건너편 집 창틀에 누군가 걸어놓은 새하얀 셔츠를 우연히 보게 됐지요. 햇살이 스며들어서 그 투명한 옷이 바삭하게 빛나더군요. 전쟁통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그걸 한참 넋을 놓고 봤던 기억이 나요. 그 햇빛, 그 눈부심, 그 사각거림, 그때 불어온 바람…. 지금 돌아보면 바로 그 순간이 내 인생의 모든 걸 결정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지난 7월 진태옥의 청담동 사무실에서 만난 패션 저널리스트 수지 멘키스(왼쪽)와 진태옥.
지난 7월 진태옥의 청담동 사무실에서 만난 패션 저널리스트 수지 멘키스(왼쪽)와 진태옥. / 보그코리아 제공
\\\"몸의 각질까지 떼어내는 한국의 미니멀\\\"

―DDP에서 50주년 전시가 있죠. 샤넬이 쇼를 하고 디올이 전시를 했던 곳입니다.

\\\"그 사람들 어마어마하게 행사를 했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서울이 이젠 참 큰 도시예요. 외국 패션 회사들은 그렇게 엄청난 자본을 들여서 쇼를 하고 전시를 치르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런 돈이 없잖아요. \\\'샤넬도 디올도 못하는 걸 하자\\\' 했어요. 그 답이라는 게 좀 뻔해도 결국 \\\'나만의 것\\\'이더라고요. 평생 만든 내 옷의 일부를 추려서 보여주려고 해요. 한 80벌 정도.\\\"

―이번에도 스타일리스트 서영희씨와 작업하셨죠.

\\\"우리나라에서 \\\'좀 잘했다\\\' 싶은 전시는 알고 보면 다 서영희씨가 한 거예요. 지금 파리 국립장식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도 서영희씨가 감독한 거고요. 이 사람은 미쳤어요. 그 전시를 위해서 꽃가마까지 가지고 갔어요. 규장각의 매혹을 그 전시를 통해 보여주겠다고 몇 달 동안 규장각 연구만 한 사람이에요. 나하고 하는 작업도 그래요. 내 옷에서 가장 대표적인 광목 시리즈를 부각시키려고 광목만 2000마(碼)를 썼어요. 켜켜이 쌓은 광목을 다 잘라서 그걸로 서책을 만들었어요. 그 서책을 전시장 가득 쌓아놨고요. 옷의 역사, 한국 패션의 역사성을 그런 식으로 보여주는 거죠.\\\"

―전시를 기념해서 젊은 사진작가들과 아트북도 내놓으신다면서요.

\\\"2005년에 김중만·구본창·김현성같이 잘나가는 우리나라 사진가들과 내 첫 패션 북을 만든 적이 있어요. 샤넬, 디올은 그렇다 치고 이세이 미야케, 레이 가와쿠보 같은 일본 디자이너들도 다 패션 북을 내놓는데, 왜 우리나라 디자이너만 그런 게 없나 싶어서 시작했어요. 처음엔 유명한 외국 작가들 섭외해서 일을 벌였죠. 그런데 누가 그러는 거예요. \\\'네가 그래도 한국 디자이너인데 우리나라 작가들하고 일해야 되는 거 아냐?\\\' 뒤통수를 탁 맞은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다시 찾아낸 게 김중만·구본창·김현성 그리고 서영희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우리가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웃음). 김중만은 내 옷들을 다 싸들고 아프리카까지 갔어요. 그 옷 부치는 데만 천만원이 들었던가 그래요. 처음엔 \\\'너무 크게 판을 벌인 것 아닌가\\\' 겁도 났었어요. 눈이 초롱초롱한 흑인 아이에게 그걸 입혀놓고 들판에 세워서 사진을 찍어온 것을 받아든 순간 가슴이 탁 막히더라고요. 기대보다 훨씬 아름다워서. 그래서 이번에도 젊은 사진작가들을 한번 모아봤어요. \\\'내 옷을 한번 마음대로 찍어보라\\\'고 주문했는데, 다들 참 거칠 것 없이 제대로 찍어내더군요.\\\"

―옷을 죽 보니 지난 50년의 굴곡이 묻어나더군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너무 잘나가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어요. 그 시절의 나는 꽤 도도했던 것 같아요. 1993년부터 파리에서 연달아 쇼를 하면서 우리나라 전통 활옷에 청바지를 겹쳐 입는 식의 파격적인 옷을 종종 무대에 올렸더랬어요. 현지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1994년엔 미국 뉴욕 버그도프굿맨백화점에 입점했고 파리에도 부티크를 냈어요. 잘 돼도 너무 잘 됐죠. 새하얀 셔츠에 가느다란 가죽 허리끈 하나만 달아줘도 그 옷이 700~800달러에 팔려나갔으니까요. 그러다가 1997년에 IMF 외환 위기를 맞았어요. 자식 같은 남성복과 아동복 라인을 하루아침에 다 정리하고 여성복만 남겼어요. 벽과 맞닥뜨린 느낌이더군요.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매일 아침 샤워할 때 울곤 했어요. 너무 막막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더라고요. 몇 달을 골방에서 무릎 꿇고 기도만 했죠. 옷을 다시 만든 건 한참 후의 일이에요.\\\"

―다시 만든 옷은 이전과 많이 달라졌나요.

\\\"이젠 주름 하나, 선 하나도 이유 없고 의미 없으면 다 뜯어내고 걷어냅니다. 진정한 미니멀이란 결국 몸에 붙어 있는 각질까지 떼어내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프도록 걷어내야 본질이 보여요. 어떤 날은 광목 천 조각 하나만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한참 바라보기도 해요. \\\'지금 이 옷은 왜 만드는가\\\'를 생각하는 거죠. 디자인은 원래 열정과 흥분에서 출발하는데, 나는 이제 침묵에서 시작해요. 사실 그게 더 어려워요. 만들다 보면 흥분하고 싶어지거든요. 덧칠하고 싶고 욕심부리고 싶어지죠. 그걸 참고 내려놓고 또 비우는 거죠.\\\"

―어떤 옷은 \\\'나와 같다\\\'고 하셨죠.

\\\"재작년인가 구슬로 작업을 해보려고 마당에 자잘한 수정 구슬들을 가득 깔아 펼쳐 놓았던 적이 있어요. 그 구슬들이 햇빛을 품고 반짝이는 걸 한참 동안 바라봤어요. 어떤 것은 투명했고 어떤 것은 불투명했어요. 문득 그게 결국 내 모습이라는 걸 알았어요. 나도 때론 그렇게 한때는 투명했고 한때는 불투명했죠. 한때는 시샘했고 또 다른 때는 절망했죠. 조용히 일어나서 그 구슬들을 일일이 손으로 꿰서 옷으로 만들었어요. 그러니 그 옷은 결국 그냥 나인 거죠.\\\"

\\\'닥종이 얼굴\\\'장윤주를 발탁하다

1997년 진태옥의 쇼에 선 모델 장윤주. 당시 16세였다.
1997년 진태옥의 쇼에 선 모델 장윤주. 당시 16세였다. / 진태옥 제공
―모델 장윤주·송경아씨를 처음으로 발탁하셨죠.

\\\"예전엔 모델도 다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보통 선호했어요. 나는 근데 그게 영 별로더라고요. 좀 더 독특한 사람에게 끌렸어요. 장윤주는 원래 뽑았던 모델이 갑자기 펑크를 내서 대타로 온 아이였어요. \\\'한 번 걸어봐라\\\' 했죠. 애가 예쁘지도 않고 키도 몸집도 작은데 뭐랄까 느낌이 남다른 거예요. 한국인의 전형적인 얼굴을 보여주는 닥종이 인형 같기도 했고요. 1997년 쇼에 그 초보를 오프닝에 내보냈어요. 지금도 그때 객석이 술렁였던 게 생각나요. 다들 \\\'쟤는 누구야\\\' 수군댔죠. 쇼가 끝날 때 제가 혼잣말로 그랬어요. \\\'저 아이가 나중에 한국의 케이트 모스가 되겠구나\\\' 하고요. 송경아도 같은 해 내 쇼로 데뷔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 이 아가씨가 씩 웃는데 입매가 어찌나 시원한지 입 안에 얼음을 숨겨놓은 것 같더라고요. 그 이후론 저와 작업을 가장 많이 하는 모델이 됐죠.\\\"

―차승원씨가 그렇게 진태옥 쇼에 서고 싶어했다면서요.

\\\"아, 그이에겐 내가 참 미안해요. 몇 번을 내 쇼에 서고 싶다고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내가 얼굴을 붉히면서 거절했어요. 너무 잘생겨서 겁이 나더라고요.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옷을 입으면 옷이 오히려 묻힐 것 같은 거죠. 지금은 엄청나게 유명해졌으니 그만 미안해 해도 되려나요(웃음).\\\"

―발레리나 김주원씨를 모델로 세운 적도 있죠.

\\\"발레리나는 내가 오랫동안 품어온 이상적인 모습 중 하나예요. 몸에 군더더기가 없고 훈련과 노력으로 다진 근육을 지닌 이들이니까요. 그들의 몸은 그들이 살아온 이력을 고스란히 말해주잖아요. 김주원씨도 그렇고. 같이 찍은 화보가 참 만족스럽더군요. 옷은 결국 입는 사람이 완성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죠.\\\"

―우리나라에도 옷을 잘 입는 정치인이 있나요.

\\\"조윤선 전 장관이 그래도 꽤 잘 입죠. 슈트를 제법 잘 소화하고요. 남자 중에선 정병국 의원이 눈에 띄더라고요. 투박하지만 넥타이를 그래도 잘 고릅디다. 좀만 다듬으면 더 멋져질 것 같아요.\\\"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가요.

\\\"너무 비슷한 스타일만 고집하는 게 제일 안타까워요.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이 만든 의류를 멋지게 소화해주면 좋을 텐데 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만 고집하는 것도 많이 아쉽죠. 정치인들이 너무 패션을 몰라서 가끔은 답답해요. 패션을 모른다는 건 그만큼 미감(美感)이 없고 센스가 없다는 얘기거든요. 옷을 잘 못 입는 사람은 그래서 정치를 잘할 수가 없죠.\\\"

―마지막 쇼 얘기를 종종 하셨죠.

\\\"딱 한 벌의 옷만 무대에 세워놓고 싶어요.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벌. 사람들 모아놓고 \\\'이게 내가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궁극의 옷이다\\\'고 말하고 그 자리를 휘휘 떠나고 싶어요. \\\"

―사람들이 어떻게 기억해주길 원하십니까.

\\\"나는 내가 아주 괜찮은 여자라고 생각해요. 디자이너로서 평생 비굴해본 적 없고, 어떤 순간에도 당당하게 살았어요. 동틀 무렵의 안개, 길가에 핀 손톱만 한 꽃, 멀리서 어두워지는 구름을 보면서도 감동할 줄 알고요. 그러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죠. 행복한 디자이너로 기억되고 싶네요.\\\"

―언제까지 디자인하고 싶으신가요.

\\\"그건 생각할 필요가 없죠. 그걸 원치 않게 된다면, 그날이 내가 죽는 날일 테니까요.\\\"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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