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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Culture



나치 독일군에 홀로 맞선 18세 女간호사…무슨 일이? [ Life-Culture]
mason (15-05-09 03:05:02, 108.46.129.188)
부상자 후송후 홀로 100명 대적…\'다신 못 볼 것 같아\'

입력일자: 2015-05-08 (금)


러시아가 세계 2차 대전 승전기념일을 맞아 추모와 축제 분위기 띄우기에 한창인 듯하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에 맞서 큰 희생을 치르면서 얻어낸 소련의 전과들이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아왔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자신의 역사관과 도덕관 역시 큰 배경이 되고 있는 듯하다. 지난해에는 2차 대전 당시 소련의 역할을 \"왜곡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안이 채택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러시아에 2차 대전을 둘러싼 역사왜곡 논쟁도 한창이다. 러시아 \'메모리얼인권기구\'의 니키타 페트로프는 지난 6일 국영 로시스카야 가제타의 국제 프로젝트인 \'러시아 비욘드 더 헤드라인즈(RBTH)\'를 통해 \"사실상 전쟁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사람은 전혀 없다\"고 단언하면서 러시아가 오히려 이 문제를 지나치게 정치화하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어쨌거나 러시아가 승전기념일인 9일 붉은광장에서 펼칠 군사 퍼레이드를 통해 신무기를 포함해 개방 이후 최대 규모의 무기를 선보이는 등 성대한 승전기념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 언론 역시 앞다퉈 전쟁 당시 숨겨진 비사나 미담 등을 발굴해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시사주간 `아르구멘트이 이 팍트이\'(논거들과 사실들) 7일자 인터넷판이 소개한 18세 여성 위생지도원(간호사)의 \'무용담\'은 눈길을 끈다.

크세니야 콘스탄티노브나는 모스크바 남동쪽 리페츠크주(州)의 한 마을에서 1925년 4월 교사 집안의 2남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초등학교와 7년제 중학교를 마치고 1940년 리페츠크간호학교에 입학했다. 학업 중 지역보건소와 현지 한 병원에서 일했다.

이런 크세니야가 전선에 나선 때는 독일군이 인근 마을을 점령한 뒤 고향인 리페츠크로 접근하던 1941년. 16세였던 크세니야는 \"보기 싫은 파시스트들이 내 조국 땅을 짓밟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다.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어머니한테 보내고 자발적으로 전선을 향했다고 한다.

소련군 보병 204사단 730연대 3대대에 간호병으로 배속돼 보로네즈와 칼리닌 전선에 투입됐다. 임무는 부상자 간호와 이송. 이 젊은 간호사는 전선에서 \"우리 땅에 단 한 명의 파시스트(독일군)라도 남아 있는 한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편지를 가족에게 보냈다. 여러 전투에서 상처를 입기도 했고 일찌감치 전투공훈 메달을 받았다.

1943년 가을 모스크바 서쪽, 드네프르강 상류에 위치한 스몰렌스크주에서 독일군과 싸우던 크세니야의 부대는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지만 크세니야는 부상자들을 돌보기 위해 홀로 남았다. 간호장이 전사해 부상자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같은 부대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발렌틴 라조렌코는 \"항상 최전선에 나섰던 크세니야는 뒤에 남는 걸 정말 싫어했지만 지휘관의 명령에는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면서 \"지휘관의 이동 명령이 떨어졌을 때 크세니야는 나를 안으며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몸조심하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부대가 떠난 뒤 숫자를 놓고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최대 100명에 이르는 독일군이 크세니야가 있던 부근 언덕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크세니야는 곧바로 마부에게 부상자들을 수레에 싣고 본 부대를 찾아 떠나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독일군을 저지하려고 홀로 남았다. 자동소총 한자루와 수류탄만 가지고.

독일군의 사격으로 결과가 뻔한 전투가 시작됐지만 18살 난 크세니야는 머리에 총상까지 입으면서도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싸웠다. 수류탄까지 투척했고 독일군은 크세니야의 탄약이 다 떨어진 뒤에야 사로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해 10월2일 그녀의 부대가 귀환했을 때 대원들은 끔찍한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라조렌코는 \"눈앞에 너무 끔직한 처형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면서 \"크세니야의 죽음은 너무 끔찍했다\"고 했다. 실제 크세니야의 두 눈은 파내졌고 코와 가슴은 베어졌으며 몸은 땅에 말뚝으로 꽂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숨진 독일군은 일각에서는 약 20명, 다른 목격자들은 약 60명에 달했다고 전하고 있다. 크세니야의 시신은 1943년 10월8일 다른 242명의 전사자와 함께 스몰렌스크주 전몰용사의 묘지에 묻혔다.

소연방 최고회의 간부회는 1944년 6월4일 \'모범적인 과제 수행과 독일 침략군과의 전투에서 보여준 용기와 영웅적 행위\'를 기려 간호장 크세니야 콘스탄티노브나에게 \'소연방 영웅\' 칭호를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크세니야의 고향 마을 학교에는 매년 단체견학이 이뤄지고 \'영웅\'의 가족들과의 만남이 이뤄진다고 한다. 크세니야가 다녔던 리페츠크간호학교(현재는 리페츠크의과대학)에는 기념비가, 중학교에는 기념판이 세워졌다. 1965년 5월 5일에는 리페츠크 클루브나야광장의 명칭이 콘스탄티노브나광장으로 개명됐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난 6일 스몰렌스크주의 루드냐에 크세니야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제막했다. 크세니야가 홀로 싸웠던 장소에서 가져온 6t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스몰렌스크주 최고의 건축가와 조각가가 기념비를 다듬었다.

이어 7일에는 스몰렌스크의 크루프가(街)에 기념판이 세워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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