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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Community



미 대학 전통음악 수업개설 교두보 다지죠 [ Korean-Community]
mason (16-03-10 09:03:23, 173.56.89.90)
쇠•장구 매력 빠져 공학도 길 접고 국악과 다시 도전
2006년 국악관현악단의 지휘자 꿈 안고 뉴욕 유학
2년뒤 해외 최초 민간취타대 결성 코리안퍼레이드 참가
퀸즈칼리지 사물놀이•취타대 수업 개설 위해 동분서주
뉴욕탁구장 문화센터...우너스톱 예•체능 공간 활용 터

그는 국악 연주가다. 국악을 보존하고 뿌리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더 나아가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다. 한인 1.5, 2세들에게 교육과 공연을 통해 한국의 정체성과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도 심어준다. 그는 해외최초 민간취타대인 뉴욕취타대 이춘승(40) 단장이다.

■ 집념의 결실
그는 1976년 서울서 태어났다. 1남 2녀의 둘째. 국악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고등학교 풍물패 클럽활동. 신명나는 장구에 반했다. 타고난 끼와 재능도 있었다. 1년 만에 상쇠 역할을 맡을 정도였다. 하지만 부모님이 국악 하는 것을 반대하셨다. 결국 음악과는 거리가 먼 세종대 지구과학과 입학했지만 공학도의 꿈을 중도에 포기했다. 쇠와 장구의 매력에 흠뻑 빠졌기 때문. 부모 몰래 학교를 포기했다.

대학 3학년 올라갈 때의 일이다. 과감히 국악공부 입시생으로 나선 것. 입시까지는 8개월 정도 남았다. 낙방하면 군대에 가야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상황. 인간문화재 김청만 선생에게 사사 받았다. 절박한 마음으로 연습했다. 최선을 다했다. 노력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에 차석으로 입학한 것. 부모님들도 장학생 합격소식을 듣고는 음악공부를 허락하셨다.

그는 1학년을 마치고 육군에 입대했다. 국방부 군악대에서 타악기 연주병과로 근무했다. 취타대 연주도 그 때 배웠다. 휴가를 반납할 정도로 맹연습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인문계 출신으로 한국음악과 차석 입학이란 예외적인 기록(?)을 남겼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늦은 입학, 복학생이란 상황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한 학기 빠른 조기졸업과 함께 수석 졸업을 할 수 있었던 이유다.

■ 새로운 세계의 도전
그는 학창시절 김영임, 장사익, 김덕수 등 전문 국악연주가들과 많은 공연을 했다. 그로인해 경험을 튼튼하게 다질 수 있었다. 지휘자의 덕목, 음악적 지식, 풍부한 인간관계 등의 축적된 비결도 전수 받을 수 있었다. 졸업 후 2년 동안의 안산시립국악관현악단 활동도 마찬가지. 갖춰진 시스템에서의 연주와 많은 공연은 또 다른 세계 개척에 필요한 경험이었다. 당시 입시생이나 프로악단 지망생을 지도했다. 교습만으로도 넉넉한 생활이었다. 하지만 그런 풍요가 또 다른 도전을 낳았다. 편안한 예술 활동 보다는 젊은이로서 건설적인 삶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는 안정적인 삶을 포기했다.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2006년 미국유학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브루클린 컨서버토리 음악학교서 합창지휘를 전공했다. 유학을 결심한 이유는 체계적인 공부를 통해 국악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입신하겠다는 꿈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많은 벽에 부딪쳤다. 영어가 미숙했다. 서양음악 이론에도 약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자신을 발견하면서 오히려 유학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있었다면 무지한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혼자 잘난 줄 알며 까불었을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적인 뉴욕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자주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됐다. 음악적으로 배운 것도 참 많았다. 참으로 귀한 시간 이었다”고 말한다.

■ 해외 최초의 민간취타대
그는 국악 전공자로서 뉴욕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이미 많은 한국전통무용수와 연주가가 활동하고 있었다. 판소리, 사물놀이 연주 등 거의 모든 장르의 예술 활동이 있었다. 하지만 유독 ‘취타대’만 없었다. 아, 이거구나 생각했다. 국방부 군악대 시절 취타대 연주를 배운 경험도 있었다. 그래서 거리축제가 끝이지 않는 뉴욕 맨하탄에 취타대 퍼레이드 재현을 계획했다.

당시는 2008년. 지인들의 아이들과 취타대를 조직했다. 한국서 공수한 악기로 여름 여름캠프에서 행진에 따른 제식과 음악을 지도했다. 캠프 후에서 9월 한 달 동안 매주 공원에 모여 연습했다. 그래서 10월에 열린 코리안 퍼레이드에 참가할 수 있었다. 사재를 털어 악기를 구입하다 보니 의상은 없었다. 장사익 선생이 써 준 ‘뉴욕 취타대’ 글씨를 새긴 노란색 티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행진했던 이유다.

그는 “다행히 신기한 악기와 음악을 보고 들은 많은 미국 시민과 관광객이 사진 찍기에 바빴다. 거리의 수많은 관객들에게 박수갈채도 받았다. 한인 1.5, 2세들에게 우리 음악전수로 한국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좋은 계기도 됐다. 특히 처음 퍼레이드 참가 순서가 150번이 넘었는데 이제는 대열의 가장 선두, 태극기 앞에서 퍼레이드들 이끌고 있다”고 말한다.

2008년 해외 최초의 민간취타대로 결성된 ‘뉴욕취타대’는 어느 덧 8년을 맞고 있다. 지난 2011년 세계국악경연대회에서는 대상을 수상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뉴욕 링턴센터, 뉴욕메츠 구장, FBI, 자연사 박물관, 타임스퀘어, 링컨메모리얼, 미국의 유명 대학 등 명소에서 공연을 할 정도로 미 사회에서 연주 실력을 인정받아 가고 있다.
그는 “어린 세대에게 민족혼을 심어주고 외부적으로 한국의 문화를 널리 알리는 취타대의 활동에 아직도 한인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이 미흡한 것은 아쉽지만, 어린 학생들이 너무나 즐겁게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볼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귀띔한다.

■ 사물놀이, 취타대 정식 수업 개설을
그는 2년 전부터 뉴욕탁구장을 인수, 운영하고 있다. 탁구장외에도 국악이나 사물놀이, 취타대 등의 공연을 할 수 있는 문화센터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취타대 연주를 비롯한 사물놀이, 모듬북, 태평소 등 국악기 보급을 위한 문화센터 역할은 물론 탁구동호인들의 교류와 탁구의 생활체육 보급에도 더욱 힘쓸 계획이다. 더불어 2세들의 탁구국가대표 양성과 노인층의 건강과 생활의 활력을 돕는 레크리에이션 등도 두루 맡겠다고. 또한 어린 학생들이 전통음악을 배우는 동안 같이 온 학부모들은 탁구를 배울 수 있는 예체능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퀸즈 칼리지 사물놀이, 취타대 수업 개설을 위한 뉴욕취타대 갈라 콘서트를 자주 열 계획이다. 올 가을 학기를 목표로 뉴욕시립대학에서의 한국 음악 관련수업 개설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퀸즈 칼리지에 한국 음악 수업이 개설되면 매 학기마다 학생들의 콘서트 형식의 수업 발표회를 할 예정이다.

뉴욕과 한국에서 활동하는 훌륭한 예술가의 무대도 함께 꾸미는 자리를 만들고자 희망하고 있다. 지난 2월 28일 뉴욕탁구장 문화센터서 열린 ‘앙코르 대금 명인 원장현’ 공연도 그런 취지였다. 그날 행사가 단지 좋은 우리 음악을 감상하고 즐기는 자리가 아니라 한국문화가 미국 뉴욕의 대학교육에 정식 수업으로 인정을 받기 위한 교두보를 놓는 초석이 되는 자리였던 셈이다.

미국 초, 중, 고교와 대학 등에서 한국음악을 적극 전파하고 있는 그는 “이번 공연은 사물놀이와 취타대 수업 개설을 위한 전초전이다. 우선 올 가을부터 퀸즈 칼리지에 정식 수업 개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한인들이 적극 동참해 주시면 못할 일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 예술의 길은 끝이 없다
그는 현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행복의 기본이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오늘, 지금, 이 순간순간을 귀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고국에 있는 부모님께 늘 미안함을 간직하고 있다. 장남으로서 곁에서 효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도 언제나 잊지 않고 있다. 비록 몸은 태평양 건너에 있지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도록 노력하며 살고 있다. 국악인으로 한국음악을 전 세계에 널리 보급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것, 한인 2세들에게 전통음악을 통해 정체성을 심어주는 역할. 그런 일들에 최선을 다하여 이유다. 모든 사람들에게 참 국악인으로 인정받고 성공하는 것이 바로 자랑스러운 아들로서 효도하는 길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백발이 되더라도 국악의 손을 놓지 않고 예술인으로 남고 싶어 한다. 그래서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음악은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것이며 예술의 길은 끝이 없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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