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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Community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들로 가득 [ Korean-Community]
mason (15-12-15 02:12:37, 72.80.49.170)
김용운 노인은 올해 86세다. 그가 인천 집을 나와 서울행 지하철에 몸을 싣는 시간은 아침 일곱 시다. 지하철 요금은 무료이나 지하철 역까지 마을 버스 요금은 800 원씩, 하루 1600 원이 든다. 김용운이 향하는 곳은 서울 종묘 공원 인근 ‘어버이 연합’ 사무실이다. 편도 한 시간 반 거리다. 이 왕래를 벌써 7 년째, 일요일을 제외한 주 6일 반복하고 있다.
김용운은 길에 떨어진 폐지도 마다 않고 줍는다. 매일 어버이 연합으로 출근하는 1백여 명의 노인들은 이처럼 십시일반 폐지를 모아온다. 모아진 폐지는 내다 팔아 단체의 운영비로 사용한다.
식대가 없어 식사를 못 하는 회원들이 많아 어버이 연합은 회원들에게 무료로 점심을 제공한다. 김용운도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먹는 밥은 일식 삼찬이다.
어버이 연합의 일관된 주장은 ‘좌파 타도, 종북 척결\'이지만 그 못지 않은 빈도로 ‘국회 해산\'을 외친다. 이런 집회를 작년에만 이백 차례 넘게 가졌다.
\"어떨 땐 하루에 세 탕을 한 적이 있었어.\"
김용운의 고향은 황해도 장연이다. 소나무 뿌리를 캐던 일정 때도 힘들었지만 6.25 전쟁은 그보다 더 참혹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패주하자 마을 사람들은 치안 위원회를 만들었다. 북한군 잔당을 소탕하며 마을을 지키는 것이 임무였는데 김용운과 그의 가족은 모두 그 일에 협력했다. 11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마을은 다시 북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분주소에 끌려갔고 친척들은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김용운은 먼저 피난길에 올랐다. 남은 가족은 나중에 뒤따를 계획이었다. 그러나 나중은 없었다. 가족 누구도 동네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어머니가 피난 보따리에 넣어준 쌀 닷 되와 엿 닷 근이 전부였다.
1951년 1월 다시 서울이 중공군에게 함락되자 미처 남으로 피난을 가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서해 연안 도서로 피신해 자발적으로 민간인 유격대를 조직했다. 대화도, 석도, 백령도, 강화도 등 대소 30여 개 섬이 그들의 본거지였다. 유격대라고는 하지만 김용운이 보기에 그들은 마적단에 가까웠다. 총이라고 해봐야 일제가 두고 간 아리사카 소총 몇 자루 뿐 낫과 죽창으로 무장했고, 짚신으로 시린 겨울 벌판을 버텼다. 그 꼴로 북이 점령한 옹진 반도에 몰래 들어가 교전하고 그들의 식량을 약탈했다. 약탈을 해도 식량은 풍족치 않았다. 쌀 한 주먹에 해초 뜯어다 죽 쒀 먹는 게 고작이었고, 물이 귀한 섬에서는 그조차 바닷물로 끓였다.
배곯다 보니 김용운은 이 전투가 북한군을 죽이기 위한 전투인지, 식량을 얻기 위한 전투인지 애매했다. 북한군을 죽여야 먹을 수 있고, 먹어야 살 수 있으니 그것은 애매해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1951년 7월 26일 미 극동군 사령부는 주한 연락처 제8240 부대를 창설해 이들을 흡수했고 그해 12월부터 직접적인 작전 통제에 들어갔다. 이북 출신인 이들이 후방 정보 수집과 교란에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 체계 없는 게릴라들이 미군으로 승격한 그럴싸한 모양새였지만, 군번도, 계급도, 월급도 없는 전투가 이들이 실제 겪어야 하는 현실이었다.
미국은 미군 200 명을 운용할 비용으로 8240 부대 1만 명을 운용했다. 전투는 1953년까지 이어졌고 휴전 즈음해서는 더 치열해졌다. 한 발 총알로 저들이 한 걸음 물러나면 우리 땅이 한 뼘 늘어날 것이라고 김용운은 생각했다. 전쟁이 끝나자 8240 부대의 존재는 감춰졌다. 미국은 자신들이 지휘하던 8240 부대의 활동을 2급 기밀로 분류해 관리했다. 이들의 존재가 알려진 건 미 육군성 문서가 기밀해제된 1990년이었다. 문서에 따르면 이들은 2만3천 명 규모로, 4천 회의 전투를 했고, 7만여 명의 적을 살상했다. 그때 김용운의 나이 22세였다
휴전 후 김용운이 정착한 곳은 인천이었다. 고향 여자를 만났고 미군 (전투식량) 박스 하나 놓고 결혼식을 올렸다. 오 남매를 낳았는데 먹을 것이 없어 구걸까지 나섰다. 부뚜막에 밥 짓는 연기 올라가는 집도 숭늉 한 그릇 내어주지 않았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가대기 치는 일을 얻었다. 일을 해도 식구들의 허기는 달래지지 않았다. 마침 베트남 특수가 터졌다. 베트남에 파견될 기술자들을 모았는데 등짐 지는 기술만으로는 높은 경쟁률을 뚫을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김용운은 부두 동료 어깨 너머로 크레인 기술을 익혔다. 몇 년 후 중동 건설 붐이 일었다. 1977년 3월 김용운은 마침내 중동으로 떠났다. 단순 노무도 아닌 크레인 기사가 그가 맡은 일이었다.
사우디 담만에서 2년,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3년 일했다. 머나먼 이국의 모래밭 위에서 흘린 땀으로 아이들은 먹고 자랐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는 쉬지 않았다. 유채꽃 따라 제주로, 사과꽃 필 때 대구로, 아카시아 쫓아 파주로, 싸리꽃 벌어지면 화천으로 벌통 싣고 전국을 홀로 떠돌았다. 가족을 먹이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사는 삶이 5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도 이어졌다.
그 고생 끝에 김용운은 자식들에게 아파트 한 채씩 사 줄 수 있었다. 자식들도 아버지의 후원 덕에 튼튼히 자리 잡고 넉넉히 살아갔다. 고향 떠나올 때 손에 쥐었던 쌀 닷 되, 엿 닷 근을 생각하면 성공한 인생이었고 남 부럽지 않은 세월이었다. IMF는 이들 가족을 비켜가지 않았다. 자식들은 줄줄이 부도가 났다. 남은 재산을 다시 자식들에게 털어줬지만 아이들은 제대로 재기하지 못했다. 그때 이미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 일할 곳도, 일할 수도 없었다. 평생을 피땀 흘려 애를 썼지만 그가 맞은 것은 가난한 노후였다. \"그렇게 아이들을 사주다 보니까네 껍데기만 남았어….그래도 오늘 하루 열심히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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