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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Community



단호했지만 '허점' 많았던 민주투사 [ Korean-Community]
mason (15-11-24 04:11:38, 72.80.49.170)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이자 문민정부의 대통령으로서 많은 공과가 있는 현대사의 큰 인물이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도 많았다.
1) \'은인\' 장택상의 돈을 사기당하다-김영삼 전 대통령을 정치권으로 이끈 사람은 장택상 전 국무총리였다. YS가 대학 2학년이었던 1948년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 참가해 2등(외무부장관상)을 차지했는데, 상을 준 초대 외무장관이 장택상이었다. YS와 장택상의 인연은 계속 이어져 1951년에는 국회부의장이 된 장씨의 인사담당 비서관으로 채용된다.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과 관련 장택상의 셋째딸 장병혜씨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아버지(장택상)는 정당을 결성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서울대 재학시절 아버지의 선거운동을 도왔던 인연으로 아버지의 비서까지 역임했던 YS 전 대통령에게 딱 한 번 정당을 만들라고 하셨던 적이 있다. 아버지는 당시 젊은 정치가였던 YS에게 꽤 많은 재산을 정리해 창당 자금으로 사용하라고 맡겼는데, 김 전 대통령이 그 자금을 모두 사기당하는 바람에 그마저도 무산되고 말았다.\"
2) 사사오입 개헌안에 서명?
최다선(9선) 의원을 기록한 YS의 정치인생 출발점은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이었다. 여당 소속으로 고향 거제도에서 당선된 것이다.
1954년 11월 29일 대통령의 중임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안이 부결됐다가 \'사사오입\' 이론이 적용돼 가결로 번복되고, 같은 해 12월 9일 YS 등 소장파 의원 12명이 자유당을 탈당한 것은 익히 알려진 얘기다. 그러나 대통령 집권연장 개헌에 반대했다는 그가 개헌안 발의의원 20명 중 9번째로 서명한 전력이 드러난 것은 32년 후의 일이다.
특히 그의 \'이중 행보\'는 1986년 야당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어떻게든 거부해보려고 했던 \'전두환의 민정당에게 더할 수 없는 호재로 작용했다. 그해 11월 26일 민정당의 공세에 대해 제1야당 신민당의 실질적 \'오너\'였던 YS는 \"당시 관례대로 원내총무실에 맡겨놓은 서명을 총무가 마음대로 도용했던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인장도 아닌 서명을 어떻게 도용할 수 있느냐는 반론에는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
3) 모친의 살해범은 간첩이었다?-1960년 9월 25일 밤 YS의 모친 박부연씨가 거제도 집에서 신원 불명의 괴한들에게 피살됐다. 훗날 \'간첩단 소행\'으로 발표된 이 사건은 YS의 정치행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전두환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벌이던 시절 그는 \"모친이 간첩에게 살해됐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의 슬픈 가족사는 군부정권이 야권의 또 다른 지도자였던 김대중에게 구사했던 \'색깔론\' 공세를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방패였고, 자신도 \"나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된다\"며 보수 세력에게 보내는 \'사상의 보증수표\'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건 자체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들이 남아있다.
1960년 9월 27일 자 보도에 따르면, 권총 강도 2명은 취침 중이던 YS의 부모 내외를 깨워 돈 200만 환을 요구했다. 박씨가 \"돈은 요구하는 대로 줄 터이니 해치지 말아달라\"며 방문을 나가려고 하자 이를 경찰에 신고하러 가는 것으로 오인한 강도들이 총을 쏜 뒤 라디오와 롤렉스 손목시계를 챙겨 도주했다.
이처럼 사건은 초기부터 \'단순 강도살인\' 사건으로 알려졌지만, 1년이 지난 이듬해 경남 경찰국은 \"YS 모친을 살해한 이정섭과 윤병윤 포함 10명의 간첩을 검거했다. 그러나 범인으로 지목된 이들은 YS모친을 살해하지 않았다고 끝까지 주장했고, 국회의원 모친의 목숨을 앗아간 거제도 간첩단의 무장강도 사건은 범행 동기와 물증 어느 것 하나 뚜렷이 남기지 못한 채 현대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4) 단호했지만 \'허점\' 많았던 민주투사-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YS의 공적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1979년 10월 4일 집권 공화당이 강행한 YS 의원직 제명은 부산-마산 시민의 민주화 항쟁을 촉발했고, 이 같은 정정 불안은 결국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로까지 이어졌다.
1983년 5월 18일부터 장장 23일까지 이어진 단식투쟁은 미국 망명 중인 김대중이 동조 시위를 벌이는 등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이후 무기력에 빠진 민주화운동 진영이 기지개를 켜는 단초를 마련했다.
대통령 취임 첫해에 하나회 출신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해 군부를 제압하고,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 공개를 실시한 것, 전두환-노태우 일당의 징역형도 \'김영삼이라서 가능했다\'고 평가되는 업적들이다.
그러나 항상 올바르고 현명한 판단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정치 9단\'으로 동료 후배들의 칭송을 받았지만, 더 노회한 상대의 수를 읽지 못해 민주화운동의 기세를 멈추게 한 경우도 많았다.
1975년 5월 21일 오전 10시 반부터 2시간 동안 이어진 박정희 대통령과의 여야 영수회담이 대표적인 예다.
영수회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YS는 2000년 발표한 회고록 에서 박 대통령의 당시 발언을 소개했다.
\"김 총재, 나 욕심 없습니다. 집사람은 공산당에 총 맞아 죽고 이런 절간 같은 데서 죽기 살기로 오래 할 생각 없습니다. 민주주의 하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이 이야기는 절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 조선 놈들은 문제가 있어요. 내가 정권을 내놓는다고 미리 알려지면 금방 이상한 놈들이 생겨날 겁니다. 대통령으로 일하는 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물론 박 대통령은 정권을 내놓지도, 민주주의를 실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듬해 야당 내분을 부추겨 YS에게 총재직을 내놓게 하고, 곧이어 시행된 야당 총재 경선에서 그를 낙선시키는 정치공작으로 괴롭혔다. YS는 3년 뒤 김대중의 지원에 힘입어 신민당 총재에 복귀할 수 있었다.
YS는 회고록에서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때 (내 앞에서) 흘린 눈물이며 말(言)은 지금 생각하면 처음부터 나를 속이려고 꾸며낸 거짓이었다\"고 술회했다.
또 1980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겸임하게 되자 재야단체에서는 \'신군부 실세\'의 등장에 우려하는 성명이 터져 나왔지만, YS는 \"상관없다. 민주화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후의 역사는 그의 이러한 기대를 철저히 짓밟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5) \'3당 합당\' 합의해놓고 겉으론 \'딴소리\'-\"나는 김대중하고는 결별한다. 김대중 제외하고 3당 간에 합의 추진하세요. 사무총장과 원내총무에게도 서서히 민정당과 합의하면 (김종필의) 공화당은 따라올 것이라고 했다\"고 3당 합당의 조속한 추진을 주문했다.
3당 합당이 물밑에서 무르익던 같은 해 9월 YS는 부산 기자회견에서 \"연말까지 5공 청산 안 하면 대통령 탄핵소추를 준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1주일 뒤 차남 김현철의 아파트에서 박철언 당시 정무1장관을 만나서는 뭐라 했을까? YS는 \"부산에서의 \'탄핵\' 기자회견은 정치적 표현일 뿐이다\"라고 이해를 구했다. 근 1년간의 물밑 협상 끝에 1990년 1월 22일 개헌선 199석을 웃도는 216석의 거대여당 민주자유당이 탄생했다.
야당에서 여당으로 변신한 후에도 YS의 말 바꾸기는 여권의 시한폭탄이었다.
민자당 공식 창당을 두 달 앞둔 1990년 3월 2일 YS는 박철언에게 3당 합당의 전제조건이었던 내각제 밀약을 지킬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박 장관, 내각제를 꼭 해야 한다고 하는데... 골치 아픈 내각제는 집어치웁시다. 내각제 합의는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중략) 이번에 박 장관이 나를 화끈하게 도와주면... 대통령을 5년밖에 더 하느냐? 민주계에 특별한 사람도 없고 대통령도 박 장관 아끼니까 서로 합심하여 키워줄 수 있는 것 아니겠소? 내각제 집어치우고 노 대통령 보좌하듯 나를 좀 도와주시오.\"
박철언은 \"저는 나이도 젊고 하니 내 장래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응수했고, 그는 3년 뒤 YS가 집권하자 슬롯머신 비리 사건으로 영어의 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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