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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iness



신용불량자 된 후 죽 쒀서 인생역전 [ Business]
mason (17-01-17 06:01:13, 100.2.20.40)
IMF 경제 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10월. 서울 갈월동 숙대입구역 길가에 말쑥하게 양복 정장을 차려입은 40대 남성이 \'호떡 리어카\'를 끌고 나타났다. 정장 구두에 흰색 조리모를 쓴 이 남성은 흥겨운 댄스음악을 커다랗게 틀어놓고 호떡을 굽기 시작했다. 예사롭지 않은 호떡 장수의 옷차림에 호기심을 느낀 여대생과 행인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이 \'양복 입은 호떡 장수\'는 지금 가맹점 1600여개에 1년 매출 2000억원대인 죽 전문점 \'본죽\'의 대표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김철호(54) 본죽 대표는 충남대를 졸업하고 30세가 되던 1993년 \'겁 없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짜먹는 인삼\'을 만들어 팔다가 1995년 유럽제 고급 목욕용품을 수입.판매해 대박을 터뜨렸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나 TV 광고에 \'거품 목욕\'이 자주 등장한 덕을 봤다. 김 대표는 \"제품이 부족할 정도로 밀려드는 주문에 하루하루가 정말 꿈같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꿈은 2년만에 산산조각 났다. \"아직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1997년 11월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고 발표했어요. 그다음 날부터 매출이 반 토막, 자고 일어나면 반의 반 토막, 또 반의 반 토막. 속수무책이었죠.\"
환율은 두 배로 치솟았고, 사람들은 지갑을 닫았다. 국산품 애용 운동이 퍼져 비싼 수입 용품이 설 자리를 잃었다. 잘나가던 회사가 IMF 석 달만에 부도를 냈다.
1998년 9월까지 파산 절차를 밟았다. 서울 방배동의 번듯한 집도, 차도 다 팔았다. 홀어머니가 살던 충남 서천의 고향집을 팔아 겨우 방 2개짜리 반지하 집을 구해 아내와 어린 딸 셋까지 식구 6명이 살았다. 그래도 세금 5000만원을 못 내 신용불량자가 됐다. 생활비가 없어 예순 넘은 노모와 초등학교도 못간 일곱 살 둘째 딸이 새벽마다 폐지를 주우러 나섰다. 무조건 \'작은 식당\'을 열어 가족을 먹여 살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갈월동 한 요리학원에 총무로 취직했다. 새벽 6시부터 밤 11시 반까지 무급으로 재료 준비와 뒷정리를 돕는 대신, 공짜로 수업을 듣고 밥도 얻어먹었다. 하지만 당장 생활비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시작한 게 리어카 호떡 장사였다. 종로5가 세운상가 앞에서 20년간 호떡을 판 상인에게 빌고 또 빌어 반죽하는 노하우를 배웠다. 친구에게 75만원을 빌려 리어카와 호떡 조리 기구를 샀다.
첫날엔 수도 없이 그만두려고 했다. \'사장님\' 소리를 듣던 시절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창피해서 죽어도 못 하겠더라고요. 누가 \'왜 여기서 호떡 팔고 있냐\' 알아볼까봐 걱정도 되고….\" 너무 긴장해서 첫날엔 호떡을 몇 개나 팔았는지 기억도 못 했다. 집에 돌아오니 호떡을 굽다 데어 손가락 끝마다 물집이 잡혔다.
호떡이 잘 팔리자 \'한 수 가르쳐달라\'며 양복 입은 40대 남성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IMF로 일자리를 잃은 회사원들이었다. 이들에게 돈을 받고 호떡 장사 \'컨설팅\'을 해줬다. 이때 \'식당 창업 컨설팅도 돈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떡 장사 1년간 번 돈을 탈탈 털어 창업 컨설팅 사업을 시작했다.
자신을 찾아온 \'예비 사장님\'들에게 김 대표는 죽 장사를 권했다. \"소화가 쉽고 영양도 풍부하지만, 현대화가 덜 돼 인기를 못 끈 \'블루오션\'\"이라고 말해도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본인이 먼저 2002년 서울대병원 근처 건물 2층에 죽집을 차렸다.
부부가 대표, 소장 맡아
\'부창부수\' 멋진 하모니
아내의 헌신 덕분…
실패와 좌절 함께 한 동반자
2002년 초가을. 아침 6시, 김철호, 최복이 부부는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함께 출근길에 나섰다. 도착한 곳은 서울 종로구 연건동 후미진 골목의 2층 죽집. 재료 준비를 마친 부부는 지하철 4호선 혜화역 3번 출구로 나갔다. 손에 들린 것은 잡기 쉽게 접은 전단지. 정장차림의 젊은 부부는 행인 한 명 한 명에게 90도로 인사하고 눈을 일일이 맞추며 전단지를 건넸다. 간절했기에 주변의 시선 따윈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기를 3개월여. 정성스러운 부부의 손길 덕에 하나 둘 손님들이 찾아왔고, 그들은 가게 인테리어와 죽의 양, 맛에 감동했다. 하루 많으면 스무 그릇 팔던 것에서 5개월 후엔 애초 목표했던 100그릇 판매의 꿈을 이뤄낼 수 있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죽’이란 아이템으로 일궈낸 한식 프랜차이즈 브랜드 ‘본죽’ 신화의 시작이었다.
대학 선후배로 만나 25년여를 함께 해온 부부는 서로에게 평생의 벗이자, 든든한 사업 동반자다. 출퇴근도 같이하고, 중요한 미팅도 함께 참석한다. 김 대표는 전체적인 회사 운영을 맡고, 최 소장은 메뉴 개발과 가맹점 교육을 챙긴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일심동체’인 셈이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미는 ‘부창부수(夫唱婦隨)’식 경영으로 본아이에프는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다. ‘본죽’을 비롯한 본국수대청, 본비빔밥, 본도시락 등 4개 브랜드의 안정적인 성장 속에 창업 8년 만에 가맹점 1200개를 돌파하고, 해외에까지 진출했다. 또 지속적인 가맹점 관리와 교육으로 프랜차이즈 업계에서 이례적인 한자릿수의 폐점률을 기록하고 있다.
남편이 여러 사업을 시도하다 번번이 실패했을 때도 생계는 최 소장의 몫이었다. 그녀는 보습학원 강사, 과외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세 아이를 키웠다.
김 대표가 목욕용품 사업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다 97년 외환 위기를 맞아 부도 처리되는 실패를 겪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살던 집도 넘어가 부부와 세 딸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음에도 묵묵히 삶의 무게를 함께 견뎌냈다.
김 대표가 외식 컨설팅 사업을 할 때 부설 요리학원에서 어깨 너머 배운 요리가 전부였다.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서 최 소장은 6개월 동안 죽만 쒔다. 그 모습을 보고 김 대표는 “흡사 무엇에 홀린 사람 같았다”고 표현했다.
뜨거운 죽이 튀어 손가락이 데는 것은 기본. 칼질을 하다 상처를 입기도 해 최 소장의 손은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다. 오래 서서 일하다 보니 다리도 퉁퉁 부었다.
김대표는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내는 가장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해 온 삶의 가장 큰 버팀목”이라고 말했다. 특히 사업에 실패하고 모두가 그를 외면했을 때, 곁을 돌아보니 아내가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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