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Life Guide
1
Board
•  한국및 전 세계 항공권(관 ...
•  전 세계 항공권 특가세일 ...
•  [논스톱박스] 믿을수있는 ...
•  귀국이사 해줄 해외 이삿짐 ...
 
 
Yellow Page
 
 
1
Children - Education
1

스피드 !! 비자 전액후불

800-664-9614

Business



블러디 메리 칵테일 즐기기 [ Business]
findall (15-11-29 01:11:38, 24.44.111.48)
과거 애주가들이 밤새워 거나하게 한잔 걸친 다음 날, 다시 만나 “해장술 하자”며 호탕하게 웃어야 남자답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애주가들의 해장술 정서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은 듯 영국에도 해장술로 애용되는 술이 있다. 바로 이름도 황홀한 “블러디 메리”(Bloody Mary) 칵테일이다. 블러디 메리 칵테일의 베이스는 보드카이다. 보드카에 토마토 주스와 오렌지 주스를 섞고, 기호에 따라 적절히 후추, 소금, 타바스코 소스를 얹어 샐러리와 조각 레몬으로 장식을 해 주면 블러디 메리가 완성된다. 이 칵테일의 유래는 ‘블러디 메리’(피의 메리, bloody mary)라는 별명을 가진 영국의 메리 튜더 1세 여왕의 이름을 따서 탄생한 것이다.
퀸 블러드 메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녀의 아버지 헨리 8세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는 역대 영국 왕들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왕의 순위에는 결코 들지 못한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져 가장 유명한 왕 또는 가장 인기 있는(존경과 관계없이) 왕 순위에는 들고 있는 듯 하다.

헨리 8세의 치세는 흔히 2가지로 잘 알려져 있다. 첫번째는 그가 평생 동안 8번 결혼하고 그 중 두명의 아내를 처형하는 등 스캔들 메이커였다는 것이고, 두번째로는 카톨릭 교도였던 스페인 출신 왕비 캐더린과 이혼하기 위해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신교)를 독립시켰다는 것이다.

헨리 8세는 두명의 딸을 두게 되는데, 바로 첫번째 왕비 캐서린이 낳은 ‘메리 튜더’(오늘의 주인공 퀸 블러디 메리)와 두번째 왕비 앤 불린과 사이에서 얻은 ‘엘리자베스 튜더’(훗날의 퀸 엘리자베스 1세)가 그들이다.

블러디 메리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그녀는 어려서 어머니가 헨리 8세로부터 이혼당하고 자신도 서녀의 신분으로 격하되어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채 외롭게 살아야 했으며, 아버지가 새로이 7명의 왕비와 차례로 결혼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그 중 2명의 왕비가 처형당하는 것까지 보며 자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헨리 8세 사후에 그녀보다 20살이나 어린 총명한 이복동생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36세까지 희망없는 노처녀로 늙어야 했다.

그녀가 어떤 여자로 성장하였는지 대략 상상이 갈 것이다.
다만, 그녀의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는 친어머니가 아버지에 의해 처형당하는 비극을 겪고, 그녀 자신은 이복언니 메리에 의해 런던탑에 갇히는 수난을 겪었음에도 훗날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왕으로 성장하게 된 것을 보면 두 이복자매의 운명은 매우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블러디 메리의 치세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 것인가?
프랑스의 역사가 앙드레 모루아는 “메리 튜더는 한 여자의 영혼 중에 애정의 고집과 절대 권력의 융합으로 생기는 혼란의 한 예”라고 표현했다.

쉽게 말하자면, 그녀는 5년의 짧은 재위기간 동안 두가지 일을 했다고 보면 된다.
첫번째는 반대파를 처형하거나 불태우거나 잡아가두는 일이고, 두번째는 멋진 신랑감을 찾아 그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녀의 치세는 한 순결한 소녀의 처형으로 시작된다.
메리 튜더의 이복 남동생인 에드워드 6세는 그녀가 훗날 ‘블러디 메리’가 될 것을 예감했었던 것일까? 에드워드 ​6세는 16세의 짧은 생애를 마치면서 추밀원 의장이었던 노섬벌랜드 공작의 조언에 따라 ‘신교를 지키기 위해’ 후계자로 헨리 7세의 손녀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지목한다.

물론, 제인 그레이는 노섬벌랜드 공작의 며느리였고, 노섬벌랜드 공작은 에드워드 6세의 사후에 재빨리 제인 그레이를 퀸으로 추대하지만, 메리 튜더는 불과 9일만에 카톨릭 세력의 지원을 받고 신교도들에게는 중립을 약속하며 런던에 무혈입성한다.

노섬벌랜드 공작과 그 아들은 당연히 제일 먼저 처형되었고, 그 다음은 16세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이었다. 그녀의 잘못이라고는 선왕 에드워드 6세의 후계자 지명과 시아버지 노섬벌랜드 공작의 명에 따라 9일 동안 잠시 퀸의 왕관을 쓴 것 밖에 없었지만 자비는 베풀어지지 않았다.

그 다음은 그녀의 이복동생 엘리자베스 튜더의 차례였다. 퀸 메리가 스페인의 필리페 왕자(훗날 필리페 2세)와 결혼하겠다고 나서자 급기야 이를 막기 위해 영국의 일부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고, 퀸 메리는 이복동생이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런던 탑에 가두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제인 그레이가 잠시 퀸의 자리에 있을 때 아직 여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이복언니 메리 튜더를 도와 그녀의 런던입성 행렬에 수행하기도 하였는데, 이처럼 참담한 수난을 겪으며 목숨을 부지한다.

이후 그녀가 런던탑에서 풀려난 것은 퀸 메리의 새신랑이 된 필리페 2세가 이러한 조치가 명예롭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엘리자베스의 석방을 요청하였던 덕분으로 알려진다. 이때의 인연 때문일까, 훗날 필리페 2세는 블러드 메리가 병석에 누워 사경을 헤매게 되자 그녀가 사망하기도 전에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도 알려진다.
메리 튜더 여왕은 제인 시모어의 9일간의 재위 당시 이를 진압하기 위해 런던에 입성하면서 신교도 세력에게 정치적, 종교적 중립을 약속하였고 추밀원 의원들과 시민들은 “메리 튜더가 카톨릭 교도이긴 해도 설마 아버지 헨리 8세가 이루어놓은 신교를 탄압하기야 하겠냐”며 메리 튜더가 집권하더라도 신교 세력에게 그렇게 치명적인 위험이 닥치지는 않을 것이라 전망해 그녀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들의 순진한 전망은 완전히 틀렸음이 밝혀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메리가 왕좌에 오른 후 당연히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퀸 메리는 어머니가 받은 설움을 복수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대대적인 신교 탄압에 나선다.

다만 그녀도 한가지 자비는 약속한다. 바로 추밀원 의원들이 참석하지 않는 자리에서는 백성을 화형시키지 않을 것이고, 화형을 집행할 때는 항상 제대로 예배를 올리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제대로 형식과 예배를 갖춘 ‘자비로운’ 화형식이 영국 전역에서 이루어져 300명이 산채로 불태워지게 되는데 그중에는 60명의 여인과 40명의 아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퀸 메리 튜더는 ‘블러디 메리’로 불리게 된다.

블러디 메리 여왕이 이처럼 백성들을 처형하고 불태우고 감금하고 탄압한 것 외에 관심가진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멋진 신랑감을 찾는 것이다.

처음 스페인 대사가 필리페 2세를 여왕의 신랑감 후보로 제안하였을 때 그녀는 겉으로는 웃어 넘겼으나 눈빛에는 기쁨이 가득 넘쳤다고 한다. 당시 유럽의 최강국이었던 스페인의 왕자 필리페는 그녀보다 무려 11살이나 어린 훤칠한 미남자였기 때문이다. 혼사를 앞둔 퀸 매리는 한밤중에 기도실에서 “주님”을 부르며 펠리페와 결혼할 것을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메리 튜더 여왕은 제인 시모어의 9일간의 재위 당시 이를 진압하기 위해 런던에 입성하면서 신교도 세력에게 정치적, 종교적 중립을 약속하였고 추밀원 의원들과 시민들은 “메리 튜더가 카톨릭 교도이긴 해도 설마 아버지 헨리 8세가 이루어놓은 신교를 탄압하기야 하겠냐”며 메리 튜더가 집권하더라도 신교 세력에게 그렇게 치명적인 위험이 닥치지는 않을 것이라 전망해 그녀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들의 순진한 전망은 완전히 틀렸음이 밝혀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메리가 왕좌에 오른 후 당연히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퀸 메리는 어머니가 받은 설움을 복수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대대적인 신교 탄압에 나선다.

다만 그녀도 한가지 자비는 약속한다. 바로 추밀원 의원들이 참석하지 않는 자리에서는 백성을 화형시키지 않을 것이고, 화형을 집행할 때는 항상 제대로 예배를 올리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제대로 형식과 예배를 갖춘 ‘자비로운’ 화형식이 영국 전역에서 이루어져 300명이 산채로 불태워지게 되는데 그중에는 60명의 여인과 40명의 아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퀸 메리 튜더는 ‘블러디 메리’로 불리게 된다.

블러디 메리 여왕이 이처럼 백성들을 처형하고 불태우고 감금하고 탄압한 것 외에 관심가진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멋진 신랑감을 찾는 것이다.

처음 스페인 대사가 필리페 2세를 여왕의 신랑감 후보로 제안하였을 때 그녀는 겉으로는 웃어 넘겼으나 눈빛에는 기쁨이 가득 넘쳤다고 한다. 당시 유럽의 최강국이었던 스페인의 왕자 필리페는 그녀보다 무려 11살이나 어린 훤칠한 미남자였기 때문이다. 혼사를 앞둔 퀸 매리는 한밤중에 기도실에서 “주님”을 부르며 펠리페와 결혼할 것을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메리 튜더 여왕은 제인 시모어의 9일간의 재위 당시 이를 진압하기 위해 런던에 입성하면서 신교도 세력에게 정치적, 종교적 중립을 약속하였고 추밀원 의원들과 시민들은 “메리 튜더가 카톨릭 교도이긴 해도 설마 아버지 헨리 8세가 이루어놓은 신교를 탄압하기야 하겠냐”며 메리 튜더가 집권하더라도 신교 세력에게 그렇게 치명적인 위험이 닥치지는 않을 것이라 전망해 그녀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들의 순진한 전망은 완전히 틀렸음이 밝혀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메리가 왕좌에 오른 후 당연히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퀸 메리는 어머니가 받은 설움을 복수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대대적인 신교 탄압에 나선다.

다만 그녀도 한가지 자비는 약속한다. 바로 추밀원 의원들이 참석하지 않는 자리에서는 백성을 화형시키지 않을 것이고, 화형을 집행할 때는 항상 제대로 예배를 올리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제대로 형식과 예배를 갖춘 ‘자비로운’ 화형식이 영국 전역에서 이루어져 300명이 산채로 불태워지게 되는데 그중에는 60명의 여인과 40명의 아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퀸 메리 튜더는 ‘블러디 메리’로 불리게 된다.

블러디 메리 여왕이 이처럼 백성들을 처형하고 불태우고 감금하고 탄압한 것 외에 관심가진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멋진 신랑감을 찾는 것이다.

처음 스페인 대사가 필리페 2세를 여왕의 신랑감 후보로 제안하였을 때 그녀는 겉으로는 웃어 넘겼으나 눈빛에는 기쁨이 가득 넘쳤다고 한다. 당시 유럽의 최강국이었던 스페인의 왕자 필리페는 그녀보다 무려 11살이나 어린 훤칠한 미남자였기 때문이다. 혼사를 앞둔 퀸 매리는 한밤중에 기도실에서 “주님”을 부르며 펠리페와 결혼할 것을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스페인의 왕자 필리페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 국민들은 나라가 스페인에 넘어가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심지어 토마스 와이엇 경은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기까지 하였으나 사랑에 눈먼 블러디 메리는 ‘사랑의 힘’으로 반란군을 가볍게 격파하고 잔인하게 처형한다. 블러디 메리가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처형하고 이복동생 엘리자베스를 런던탑에 가둔 것도 이무렵이다.
그녀가 스페인의 왕자 필리페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 국민들은 나라가 스페인에 넘어가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심지어 토마스 와이엇 경은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기까지 하였으나 사랑에 눈먼 블러디 메리는 ‘사랑의 힘’으로 반란군을 가볍게 격파하고 잔인하게 처형한다. 블러디 메리가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처형하고 이복동생 엘리자베스를 런던탑에 가둔 것도 이무렵이다.
이처럼 퀸 매리가 그토록 사랑받고 싶어했던 남자 필리페 2세는 스페인에 머물던 중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청하기 위해 런던을 방문하게 되는데, 영국 의회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관여하는 것에 극구 반대하였으나 결국 여왕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게 되고 필리페 2세는 비로소 흡족해 한다.

그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고집 센 여왕은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필리페 2세를 위해) 무리하게 전쟁자금을 끌어모았지만 여왕의 군대는 프랑스 군에 격파당하고 프랑스 내의 교두보였던 칼레항을 잃게 된다. 오늘날 도버 해협을 횡당하는 유로터널의 프랑스측 출발지가 되는 바로 그 칼레항이 함락당한 것이다.

퀸 매리는 필리페 2세와의 아이를 그토록 갈구하여 길지 않은 결혼생활 동안 2번의 상상임신을 겪게 되는데, 두번째는 그녀의 건강에 치명적인 부종임을 알게 되고 죽음의 병상에 홀로 눕게 된다. 죽기 한달 전 그녀는 거의 홀로 있었는데, 이는 모두가 차기 여왕이 될 엘리자베스 곁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지막에 “내가 죽은 다음 몸을 열어 보면 심장에 필리페와 칼레라고 새겨져 있을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쓸쓸히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녀가 왕위에 오른지 5년 만이었고 칼레가 치욕스럽게 함락당하였던 바로 그해였다. 역사가 찰스 디킨스는 블러디 메리에 대해 “그녀의 열매는 화형대와 화염이었으며, 여왕을 평가할 때 그 외 다른 잣대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고 평가한다.

블러디 메리의 죽음에 대해 남편 필리페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는 공식적으로 “나는 그녀의 죽음에 합당한 만큼의 조의를 느꼈다”는 반응을 남긴채, 곧바로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하게 된다. 물론, 버진 퀸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는 엘리자베스는 필리페의 청혼을 거절하고 훗날 그의 무적함대와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블러드 메리의 인생에서 필리페 2세가 없었다면 그녀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필리페 2세가 없었다면 블러드 메리가 아닌 버진 퀸(VIRGIN QUEEN)이 되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블러디 메리 칵테일에서 알콜 성분을 뺀 칵테일은 바로 ‘버진 메리’ 칵테일이니 함께 즐기면 좋을 것이다.

이밖에도 블러디 메리 칵테일과 함께 즐기면 좋은 칵테일이 한가지 더 있으니, 바로 프린세스 메리 칵테일이다. 이는 현재 영국여왕의 고모인 프린세스 메리의 1922년 결혼식을 축하하여 바텐더들이 만들어낸 칵테일로 전해지는데, 알렉산더 칵테일의 베이스를 브랜디에서 진으로 바꾼 것으로 진을 카카오와 혼합하고 생크림을 적절히 얹어 달콤하게 즐기면 된다.


그렇다면 여왕의 위험한 핏빛 유혹, 블러디 메리 칵테일의 맛은 어떨까?

생전 블러디 메리가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였던 공포와 혐오의 대명사인 것과 정반대로 블러디 메리 칵테일만은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으니 한번쯤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다만, 폭음후의 해장을 하기 위해서라면 우아하게 블러디 메리 칵테일을 즐기는 것보다 당장 해장국집으로 직행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Home  고객 센터부동산사고팔기1 개인 보호 정책 홈페이지 제작   
33-70 Prince Street #601, Flushing, NY 11354, USA   TEL 718-359-0700 / FAX 718-353-2881  
미동부 벼룩시장 (718)359-0700 / 뉴욕 벼룩시장 (718)353-3805 / 뉴저지 벼룩시장 (201)947-6886  
Copyright©Juganphila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