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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쓴 '노예공화국 북조선 탈출' [NY People]
mason (19-07-24 12:07:46, 24.103.114.219)
탈북한 딸이 19년만에 아빠의 수기 출판 아빠는 탈북 실패...모진 고문 후유증 사망

한원채 씨는 북한에서 국기훈장 5개, 과학기술발명권 3개, 신기술 등록증 3개, 창의고안증 35개를 보유한 유능한 과학기술자였다. 그는 꿈과 희망을 잃은 북한의 체 제에 염증을 느껴 탈북했으나 끝 내 북송돼 모진 고문을 당했고, 얼 마 안있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 고 있다. 1급 설계원 한원채(1943~2000) 씨는 1998년 8월 공화국을 버렸 다. 배급이 끊겨 굶어 죽는 사람 이 속출한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 다. 아내와 세 자녀까지 한씨 가족 은 함경북도 길주 고향집 출입문 을 자물쇠로 잠그고 맨몸으로 떠 났다.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을 떠 돌았지만 한국으로 가는 길은 좀 처럼 열리지 않았다. 공안에게 붙 잡혀 북송됐다가 재탈북하기를 두 차례, 그는 모진 고문과 수감 생활을 중심으로 북한에서 겪은 일을 원고지에 옮기기 시작했다. \"탈출해 실상을 알리자. 이 글이 북한에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이다. 내가 죽더라도 가족 중 한 명은 꼭 살아서 한국으로 가야 한 다. 단어 하나도 바꾸지 말고 책으 로 내보내라.\" 일주일 만에 수감기를 탈고하고 둘째 딸 봉희씨에게 했다는 말이 다. 압수당할까 봐 복사본을 만들 어 두 곳에 맡겼다. 2000년 9월 한 씨 부부는 중국 연길에서 타지로 이동한 직후 중국 공안에게 체포 돼 강제로 송환당하고 말았다. 따 로 움직인 세 남매는 무사했다. 어 느 일본 출판사가 한씨 원고를 읽 고 인세를 선불로 건넸다. 5000달 러였다. 피로 쓴 수난기가 자식들 에게 한국 가는 경비, 안전한 미래 를 선물한 셈이다. 한씨는 고문으로 사흘 만에 운명 한 것으로 알려졌다. 몸은 북송됐 지만 글은 탈북했다. 이 책을 세상에 내보내지 못하고 고인이 된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 고 싶은 둘째 딸 한봉희씨(사진) 가 한의원 원장이 된후 20년간 간 직하고 있던 아버지의 유고를 펴 낸 것이다. 한봉희 원장(사진)은 “대한민국 에 입국한 이후 목숨을 바쳐 자식 을 구해준 부모님의 기대에 꼭 보 답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한 순간 도 헛되이 살지 않고 악착같이 노 력해 한의사가 됐다”며 “한국은 북한처럼 그 누구의 간섭이나 통 제, 감시 없이 자유롭게 마음껏 날 개를 펴고 날 수 있는 천국 같은 사회”라고 말했다. 한봉희 원장은 대학 졸업후 한의사 자격증을 따 자, 은행에서 1억원을 융자해주 어서 한의원을 오픈할 수 있었다 고 한다. 한봉희 원장은 “탈북 이후 북한 은 거액의 포상금을 걸고 연길시 내 등 조선족자치주까지 보위부 가 직접 찾아 나섰기 때문에 하 루하루가 두려움과 공포의 시간 이었다”며 “이런 절박한 상황에 서도 아버지의 결심은 가족 중 단 한 명이라도 살아서 꼭 한국으로 가야 하며, 반드시 북한의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이야 기했다. 중국과 조선 감방 생활 3개월 동 안 한원채씨는 강제노동에 시달 리며 온갖 악형과 고문, 심문을 받 았다. 특히 장작과 고무몽둥이, 칼 고리줄을 이용한 폭행을 비롯해 뽐뿌 처벌, 오토바이 처벌, 직승기(헬리콥터) 처벌, 전기봉 고문 등 듣도 보도 못한 온갖 고문 등, 직접 당하거 나 목격한 것을 글로 썼다. 한원채씨 가족은 북한에서는 인 텔리에 속했다. 탈북할 때까지 한 원채씨는 함북 길주 펄프 공장에 서 35년간 기계 설계사로 일했다. 아내는 철도국병원 내과 의사. 두 딸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아들 은 고등학생이었다. 하지만 6, 25 전쟁 때 부친이 남으로 간 \'월남 자 가족\'이라는 배경이 그들을 괴 롭혔다. 2001년 8월 한봉희씨는 캄보디아 에서 태국을 거쳐 날아오는 내내, 어쩌면 그전부터 ‘한국 땅을 밟으 면 마음껏 소리 질러야지’ 생각했 다고 한다. 막상 인천공항에 도착 하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단다. 눈물만 나오지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너무 벅차서, 부모님께 미 안해서... 나중에 들어보니 다른 탈북자들도 모두 같은 경험을 했 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본 출판사에 ‘자식들 이 한국으로 무사히 들어온 다음 에 출간한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한봉희씨는 그동안 대학 들 어가고 결혼하고 아이 키우느라 바빴고, 일본에서 책이 나온 걸 작 년에야 알았다. 늦었지만 우리말 로 출간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한봉희씨는 마지막으로 “요즘 무 너지고 있는 한국의 국방과 안보 가 걱정”이라며 “복지가 나라를 좀먹고 있는데 공짜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태도가 평등을 좇다 추 락한 북한 사회를 보는 것 같아 가 슴 아프다”고 했다. 마치사람 몸으 로 치면 넘치는 자유와 풍요가 비 만을 불렀고 심정지 직전의 상태 가 한국이라는 것이다. 입국 후 요즘처럼 위기감을 느낀 적이 없 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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