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원채 씨는 북한에서 국기훈장 5개, 과학기술발명권 3개, 신기술 등록증 3개, 창의고안증 35개를 보유한 유능한 과학기술자였다. 그는 꿈과 희망을 잃은 북한의 체 제에 염증을 느껴 탈북했으나 끝 내 북송돼 모진 고문을 당했고, 얼 마 안있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 고 있다. 1급 설계원 한원채(1943~2000) 씨는 1998년 8월 공화국을 버렸 다. 배급이 끊겨 굶어 죽는 사람 이 속출한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 다. 아내와 세 자녀까지 한씨 가족 은 함경북도 길주 고향집 출입문 을 자물쇠로 잠그고 맨몸으로 떠 났다.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을 떠 돌았지만 한국으로 가는 길은 좀 처럼 열리지 않았다. 공안에게 붙 잡혀 북송됐다가 재탈북하기를 두 차례, 그는 모진 고문과 수감 생활을 중심으로 북한에서 겪은 일을 원고지에 옮기기 시작했다. \"탈출해 실상을 알리자. 이 글이 북한에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이다. 내가 죽더라도 가족 중 한 명은 꼭 살아서 한국으로 가야 한 다. 단어 하나도 바꾸지 말고 책으 로 내보내라.\" 일주일 만에 수감기를 탈고하고 둘째 딸 봉희씨에게 했다는 말이 다. 압수당할까 봐 복사본을 만들 어 두 곳에 맡겼다. 2000년 9월 한 씨 부부는 중국 연길에서 타지로 이동한 직후 중국 공안에게 체포 돼 강제로 송환당하고 말았다. 따 로 움직인 세 남매는 무사했다. 어 느 일본 출판사가 한씨 원고를 읽 고 인세를 선불로 건넸다. 5000달 러였다. 피로 쓴 수난기가 자식들 에게 한국 가는 경비, 안전한 미래 를 선물한 셈이다. 한씨는 고문으로 사흘 만에 운명 한 것으로 알려졌다. 몸은 북송됐 지만 글은 탈북했다. 이 책을 세상에 내보내지 못하고 고인이 된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 고 싶은 둘째 딸 한봉희씨(사진) 가 한의원 원장이 된후 20년간 간 직하고 있던 아버지의 유고를 펴 낸 것이다. 한봉희 원장(사진)은 “대한민국 에 입국한 이후 목숨을 바쳐 자식 을 구해준 부모님의 기대에 꼭 보 답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한 순간 도 헛되이 살지 않고 악착같이 노 력해 한의사가 됐다”며 “한국은 북한처럼 그 누구의 간섭이나 통 제, 감시 없이 자유롭게 마음껏 날 개를 펴고 날 수 있는 천국 같은 사회”라고 말했다. 한봉희 원장은 대학 졸업후 한의사 자격증을 따 자, 은행에서 1억원을 융자해주 어서 한의원을 오픈할 수 있었다 고 한다. 한봉희 원장은 “탈북 이후 북한 은 거액의 포상금을 걸고 연길시 내 등 조선족자치주까지 보위부 가 직접 찾아 나섰기 때문에 하 루하루가 두려움과 공포의 시간 이었다”며 “이런 절박한 상황에 서도 아버지의 결심은 가족 중 단 한 명이라도 살아서 꼭 한국으로 가야 하며, 반드시 북한의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이야 기했다. 중국과 조선 감방 생활 3개월 동 안 한원채씨는 강제노동에 시달 리며 온갖 악형과 고문, 심문을 받 았다. 특히 장작과 고무몽둥이, 칼 고리줄을 이용한 폭행을 비롯해 뽐뿌 처벌, 오토바이 처벌, 직승기(헬리콥터) 처벌, 전기봉 고문 등 듣도 보도 못한 온갖 고문 등, 직접 당하거 나 목격한 것을 글로 썼다. 한원채씨 가족은 북한에서는 인 텔리에 속했다. 탈북할 때까지 한 원채씨는 함북 길주 펄프 공장에 서 35년간 기계 설계사로 일했다. 아내는 철도국병원 내과 의사. 두 딸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아들 은 고등학생이었다. 하지만 6, 25 전쟁 때 부친이 남으로 간 \'월남 자 가족\'이라는 배경이 그들을 괴 롭혔다. 2001년 8월 한봉희씨는 캄보디아 에서 태국을 거쳐 날아오는 내내, 어쩌면 그전부터 ‘한국 땅을 밟으 면 마음껏 소리 질러야지’ 생각했 다고 한다. 막상 인천공항에 도착 하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단다. 눈물만 나오지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너무 벅차서, 부모님께 미 안해서... 나중에 들어보니 다른 탈북자들도 모두 같은 경험을 했 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본 출판사에 ‘자식들 이 한국으로 무사히 들어온 다음 에 출간한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한봉희씨는 그동안 대학 들 어가고 결혼하고 아이 키우느라 바빴고, 일본에서 책이 나온 걸 작 년에야 알았다. 늦었지만 우리말 로 출간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한봉희씨는 마지막으로 “요즘 무 너지고 있는 한국의 국방과 안보 가 걱정”이라며 “복지가 나라를 좀먹고 있는데 공짜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태도가 평등을 좇다 추 락한 북한 사회를 보는 것 같아 가 슴 아프다”고 했다. 마치사람 몸으 로 치면 넘치는 자유와 풍요가 비 만을 불렀고 심정지 직전의 상태 가 한국이라는 것이다. 입국 후 요즘처럼 위기감을 느낀 적이 없 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