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Life Guide
1
Board
•  전 세계 항공권 특가세일 ...
•  [논스톱박스] 믿을수있는 ...
•  귀국이사 해줄 해외 이삿짐 ...
•  미국비자 발급 ( www. ...
 
 
Yellow Page
 
 
1
Children - Education
1

스피드 !! 비자 전액후불

800-664-9614

Opinion



이명석칼럼77-미주한인의 아버지 서재필 박사 [ Opinion]
mason (15-05-23 07:05:08, 108.46.129.188)
흔히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을 미주한인이민사의 효시라고 한다. 그러나 한인이민의시조는 1895년 미국에 온 서재필박사다. 지난 주말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기념관을 방문했다. 뉴욕광복회가 마련한 대형버스를 타고 아내, 두 딸, 그리고 40명의 학생, 어른들과 함께였다. 평소 말로만 듣던 서재필박사의 일생을 이번 기회에 잘 알게 되었다.
서재필박사는 많은 면에서 최초의 기록을 갖고 있다. 한인 최초의 의사, 최초의 개업의, 최초의 연방공무원, 최초의 미시민권자, 최초의 국제결혼자, 최초의 미국훈장 수여자, 최초의 한인사업가이자 언론인, 그리고 최초의 독립운동가였고, 최초의 민간외교관이었다. 기념관의 한 안내자가 서재필박사를 한인 최초의 파산자라고도 소개했다. 한때 그는 50여명의 직원을 둔 인쇄소와 문구점을 운영한 부자였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재산과 시간을 쓰면서 사업이 파산한 것이다.
서재필박사는 18세에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고, 벼슬길에 올랐지만 개화사상에 심취하여 약관 20세에 김옥균,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주도하다가 3일천하로 실패해 멸문지화를 당하고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왔다.
고국에서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의 기분이 어떠했을까. 부모와 아내가 자살하고, 두살 된 아들도 굶어 죽고, 형과 동생도 처형되었다. 20세에 쿠데타에 가담한 젊은이의 심장은 갈갈이 찢어졌을 것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독학으로 공부하며 기독교인이 된 그는 워싱턴DC의 육군 의학도서관에 취직하며 공부에 전념, 의대를 졸업한 후 7살 아래의 백인여성 뮤리엘과 국제결혼한다. 그리고 조국을 못잊어 아내를 데리고 귀국, 한글로 된 독립신문을 발행한다.
배재학당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1896년 독립협회를 조직했고,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조국은 한일합방이 되고만다.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그는 미국인 후배와 문방구와 인쇄업을 시작, 성공을 거두었고,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다는 소식에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150여명의 한인을 모아 독립을 외치는 제 1차 한인대회를 개최한 후 독립운동을 계속 지원해 주었다.
이후 한국문제로 시간과 정력을 다 바쳐 건강이 상하고 사업체는 남의 손에 넘어간다. 가진 집만 남기고 가진 재산 8만불을 모두 날려 빈털터리가 된다. 갑신정변, 독립협회, 3.1운동 등 세 번에 걸친 애국운동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낙심천만한 그는 독립운동에서 물러서고 만다. 1926년 62세의 노인이 된 다시 의학공부를 시작한다. 이후에는 이런 저런 병원을 옮겨 다니며 의료에 종사하고, 2차대전 때는 미군들의 징병검역관을 하기도 한다. 언론매체에 글을 써 조국의 백성을 깨우치고, 미국인들에게는 한국을 알리고 동포들을 결집시키는 일도 계속한다.
1945년 드디어 조국이 해방된다. 국민을 한데 모을 수 있을 만한 지도자로서 노투사 서재필을 모셔 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이승만과 불편한 관계인 주둔군 사령관 하지 장군이 그를 미군정 최고고문으로 모셔온다. 민중은 조국의 개혁과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를 뜨겁게 환영한다. 미시민권자로서 국내정치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 하는데도 수천명이 그를 대통령으로 모시자고 한다. 정치적 혼란이 84세의 노인을 슬프게 한다. 그는 같이 노인이 된 제자 이승만보다도 11살이나 위다.
1948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만이 조국을 위하는 길이라고 결심, 귀국 1년여 만에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그리고 한국전쟁 소식을 듣고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면서 1951년 1월 87년의 한많은 인생을 마감한다.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 파란만장한 그의 삶을 더듬어보며, 서재필 기념관을 방문한 40명은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본받을 위인이 많지 않은 미주한인들에게 그는 미주한인의 시조이자 사표가 되기에 충분하다.
 
Home  고객 센터부동산사고팔기1 개인 보호 정책 홈페이지 제작   
33-70 Prince Street #601, Flushing, NY 11354, USA   TEL 718-359-0700 / FAX 718-353-2881  
미동부 벼룩시장 (718)359-0700 / 뉴욕 벼룩시장 (718)353-3805 / 뉴저지 벼룩시장 (201)947-6886  
Copyright©Juganphila All Right Reserved